다시

큰 달 떠오르는 저녁이면
당산나무 큰 가지
치마 풀어 걸어놓고
그래, 모두 지랄염병이었어
신파조로 컹컹거리면서
성냥 좌악 그어 담배 붙여물고
침 카악 뱉고
눈물 그렁그렁 담아서
먼 산 바라보며
당산나무 손가락마다
붉은 옷고름 뜯어 걸어놓고

새 몸주님 보오시라
탯줄 가지 마다
피 멕인 고름 걸어두었으니
들어와보오시라 흠향하시라
너울너울 즐기시라
향긋한 오줌 차오르는
너른 태반가에
돗자리 깔아놓았으니
들어와 누우시라
정말 또 한 번 속아주고 싶은
새 몸주님

코 히잉 풀어놓고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당산나무 빙빙 돌면서
그러나, 언제나 지랄염병이엇어
뱃속에 아직 남은 미친 세월을 꽝꽝 두드리면서
가슴을 꽝꽝 치면서
담배꽁초 휙 던지면서
마른 북어 탕탕 두드리면서
새 몸주님 들어와보오시라

김혜순(1990)

큰 눈동자 이야기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보니 지구는 마치 한 개의 눈동자였습니다. 그의 우주선 그림자가 지구에 은은히 비쳤습니다. 그는 우주선을 타고 그 눈동자 안으로 진격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젖은 눈동자 위에서 날선 스케이트를 타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눈동자 위에다 집을 짓고 탱크를 굴리는 개미떼 같은 사람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는 눈동자 위에서 살면서 문을 잠그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눈동자 위에서 우물을 파고 그 물을 받아먹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는 하염없이 지구를 돌았습니다. 눈꺼풀이 없어 한번도 눈감지 못하는 지구와 그는 간혹 쓸쓸히 눈을 맞추기도 하였습니다. 지구의 눈엔 핏발이 자주 서고 눈물이 눈동자 밖으로 흘러넘쳤습니다.

겨눠 총!
병사들은 밤중에만
방아쇠를 당깁니다
나방이를 쫓는 연기처럼
탄환이 쏟아집니다
흰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져 달아납니다
낮은 포복으로! 자세를 낮춰!
밤고양이처럼
총구에 제 눈동자를 매단 채
병사들이 다가갑니다
젖은 눈동자 위에서
한번도 눈 깜박이지 못하는
핏발 선 안구를 짓밟고

김혜순(1990)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안도현

측백나무가 되어

측백나무 울타리에 내려앉는 참새떼,
가까이 가도 날아가지 않는다
고마워라
나를 측백나무 한 그루쯤으로 여기는

안도현

세상의 비둘기들

자, 이제부터 너는 부디 망각되어라
세상의 비둘기들, 평화의 상징들
어제도 너는 대로를 가로지르며 버스와 대적하기도 하였겠지만
바퀴에 짓이겨지는, 눈살 찌푸려지는 너는 소멸하라
너의 유일한 상징성이란 것
초고속으로 솟아오른 초고층의 도시 하늘처럼
일자로 뻗은 가로수의 콧대 높은 숨소리처럼
뺀질거리는 일상의 껍데기라는 것
거리 곳곳에 배인 너의 냄새에서
도적과 같은 탐욕의 찬가는 퍼뜨려지고
한 알 쌀알에 대한 감사한 인사와 창공을 향한 겸손하도록 높은 도약은
방향제에 취하듯 종적을 감추었더라
그러니, 너의 뿌려진 깃털만큼 가벼워진 세상의 마음은
울적할 대로 울적해져서는
비가 내릴 때마다 죽어버린 사랑이 넘치고
광고판을 쉴 사이 없이 닦아내던 저 고고한 모험가의 위용도
사실 이상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는 깊은 후회와 함께
손때 묻은 걸레와 함께
시멘트 바닥으로 풀썩 안겼던 것이다
단지 그 날만, 불붙은 성화 위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던
한 마리 불사조의 전설과 함께 날아가 버린 너는
상징적인 것
재개발되는 최첨단 집터로 옮아간 것
매캐한 타이어의 불씨에 녹아서 검은 연기처럼만 피어오른 것
그리하여, 너는 기록에서 사라져 버려라.

시간

그대의 발길이 잠시 내게 머물면서
이로부터 나는 너를 진심으로 그리워한다
너는 아름다운 방문객
째깍거리며 돌아가는 하늘 아래
어지럽고 미식거리던
점점이 부서지는 나의 의식은
각성제를 먹는 한이 있더라도 진심으로 네가 그립다
비록 늘 앞서는 그대의 긴 여운이었고
바람 같은 나는
속 깊은 먼지로 나를 치장하였음에도
무심히 반복되는 너의 격려에
그대의 똑부러진 욕망을 따라 울어 걸으며
빛처럼 긴 꼬리를 흔드는 나는
한 없이 해맑아지면서라도
땡땡땡 종소리를 따르는, 겁 없이 너의 동행자 된다

동상

너를 보면서 세상엔
도모하지 않아도 좋은 것들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난 위로 받는다.
탄생과 함께 이미 네 손에 쥐어진 검은 검으로
또는 지혜의 책과 정의의 지팡이로
생활화돼 버린 우리의 기대를 한껏 자랑하는 너를 보면서
세상엔 고뇌하지 않기에 쉬워진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난 또 위로 받는다.

언뜻 보기엔
부담스러운 조명을 받고도 우뚝 솟아가는 밤거리의 소란들에 잊혀지는
시체와 같은 것이라고 너 자신 자조할지도 모르겠으나
반드시 울부짖으며 한 호흡마다를 살아가는
파리의 날개짓에게나 필요한
팽팽한 긴장감을
내 온몸으로 누리는 그 위태한 자유의 만끽을
나는 너를 보면서 달래곤 한다.

세상의 시선이 닿지 않는 시간이 되면
우리의 기대와 함께 너는 아마 산산이 분해될 운명이다.
흐느적거리는 쇳물이 되거나 가벼운 가루가 되어서
네게 주어진 것들과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러므로
찰나의 번뜩임으로 빚어진 너란 자세를
시간에 쫓기는 나는 기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