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가다 산책하기

煙氣

연기는 누구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해발 이천육백척의 고지에서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바닷바람이 무섭다고
구름을 향하여 도망하는 놈
숫자를 무시하고 사는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래된 연기

자의식에 지친 내가 너를
막상 좋아한다손 치더라도
네가 나에게 보이고 있는 시간이란
네가 달아나는 시간밖에는 없다

평화와 조화를 원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선수
백화가 만발한 언덕 저편에
부처의 심사같은 굴뚝이 허옇고
그 우에서 내뿜는 연기는
얼핏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연기의 정체는 없어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필 꽃밭 넘어서
짓궂게 짓궂게 없어져보려는
심술맞은 연기도 있는 것이다

김수영(1955)

映寫板

고통의 영사판 뒤에 서서
어룽대며 변하여가는 찬란한 현실을 잡으려고
나는 어떠한 몸짓을 하여야 되는가

하기는 현실이 고귀한 것이 아니라
영사판을 받치고 있는 주야를 가리지 않는 어둠이
표면에 비치는 현실보다 한치쯤은 더
소중하고 신성하기도 한 것인지 모르지만

나의 두 어깨는 꺼부러지고
영사판 우에 비치는 길잃은 비둘기와같이 가련하게 된다

고통되는 점은
피가 통하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
비둘기의 울음소리

구 구 구구구 구구

시원치않은 이 울음소리만이
어째서 나의 뼈를 뚫으고 총알같이 날쌔게 달아나는가

이때이다---
나의 온 정신에 화룡점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영사판 우의 모오든 검은 현실이 저마다 색깔을 입고
이미 멀리 달아나버린 비둘기의 두 눈동자에까지
붉은 광채가 떠오르는 것을 보다

영사판 양편에 하나씩 서있는
설움이 합쳐지는 내 마음 우에

김수영(1955)

거미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김수영(1954)

쾌락

님이여, 당신은 나를 당신 계신 때처럼 잘 있는 줄로 아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나를 아신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두고 멀리 가신 뒤로는, 나는 기쁨이라고는
달도 없는 가을 하늘에 외기러기의 발자취만치도 없습니다.

거울을 볼 때에 절로 오던 웃음도 나오지 않습니다.
꽃나무를 심고 물 주고 북돋우던 일도 아니합니다.

고요한 달 그림자가 소리없이 걸어와서 엷은 창에 소근거리는
소리도 듣기 싫습니다.
가물고 더운 여름 하늘에 소낙비가 지나간 뒤에,
산모퉁이의 작은 숲에서 나는 서을한 맛도 달지 않습니다.
동무도 없고 노리게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 가신 뒤에 이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쾌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따금 실컷 우는 것입니다.

한용운

복종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더 달콤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한용운

다시

큰 달 떠오르는 저녁이면
당산나무 큰 가지
치마 풀어 걸어놓고
그래, 모두 지랄염병이었어
신파조로 컹컹거리면서
성냥 좌악 그어 담배 붙여물고
침 카악 뱉고
눈물 그렁그렁 담아서
먼 산 바라보며
당산나무 손가락마다
붉은 옷고름 뜯어 걸어놓고

새 몸주님 보오시라
탯줄 가지 마다
피 멕인 고름 걸어두었으니
들어와보오시라 흠향하시라
너울너울 즐기시라
향긋한 오줌 차오르는
너른 태반가에
돗자리 깔아놓았으니
들어와 누우시라
정말 또 한 번 속아주고 싶은
새 몸주님

코 히잉 풀어놓고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당산나무 빙빙 돌면서
그러나, 언제나 지랄염병이엇어
뱃속에 아직 남은 미친 세월을 꽝꽝 두드리면서
가슴을 꽝꽝 치면서
담배꽁초 휙 던지면서
마른 북어 탕탕 두드리면서
새 몸주님 들어와보오시라

김혜순(1990)

큰 눈동자 이야기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보니 지구는 마치 한 개의 눈동자였습니다. 그의 우주선 그림자가 지구에 은은히 비쳤습니다. 그는 우주선을 타고 그 눈동자 안으로 진격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젖은 눈동자 위에서 날선 스케이트를 타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눈동자 위에다 집을 짓고 탱크를 굴리는 개미떼 같은 사람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는 눈동자 위에서 살면서 문을 잠그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눈동자 위에서 우물을 파고 그 물을 받아먹는 사람들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는 하염없이 지구를 돌았습니다. 눈꺼풀이 없어 한번도 눈감지 못하는 지구와 그는 간혹 쓸쓸히 눈을 맞추기도 하였습니다. 지구의 눈엔 핏발이 자주 서고 눈물이 눈동자 밖으로 흘러넘쳤습니다.

겨눠 총!
병사들은 밤중에만
방아쇠를 당깁니다
나방이를 쫓는 연기처럼
탄환이 쏟아집니다
흰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져 달아납니다
낮은 포복으로! 자세를 낮춰!
밤고양이처럼
총구에 제 눈동자를 매단 채
병사들이 다가갑니다
젖은 눈동자 위에서
한번도 눈 깜박이지 못하는
핏발 선 안구를 짓밟고

김혜순(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