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寫板

고통의 영사판 뒤에 서서
어룽대며 변하여가는 찬란한 현실을 잡으려고
나는 어떠한 몸짓을 하여야 되는가

하기는 현실이 고귀한 것이 아니라
영사판을 받치고 있는 주야를 가리지 않는 어둠이
표면에 비치는 현실보다 한치쯤은 더
소중하고 신성하기도 한 것인지 모르지만

나의 두 어깨는 꺼부러지고
영사판 우에 비치는 길잃은 비둘기와같이 가련하게 된다

고통되는 점은
피가 통하는 듯이 느껴지는 것은
비둘기의 울음소리

구 구 구구구 구구

시원치않은 이 울음소리만이
어째서 나의 뼈를 뚫으고 총알같이 날쌔게 달아나는가

이때이다---
나의 온 정신에 화룡점정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영사판 우의 모오든 검은 현실이 저마다 색깔을 입고
이미 멀리 달아나버린 비둘기의 두 눈동자에까지
붉은 광채가 떠오르는 것을 보다

영사판 양편에 하나씩 서있는
설움이 합쳐지는 내 마음 우에

김수영(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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