煙氣

연기는 누구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해발 이천육백척의 고지에서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바닷바람이 무섭다고
구름을 향하여 도망하는 놈
숫자를 무시하고 사는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래된 연기

자의식에 지친 내가 너를
막상 좋아한다손 치더라도
네가 나에게 보이고 있는 시간이란
네가 달아나는 시간밖에는 없다

평화와 조화를 원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선수
백화가 만발한 언덕 저편에
부처의 심사같은 굴뚝이 허옇고
그 우에서 내뿜는 연기는
얼핏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연기의 정체는 없어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필 꽃밭 넘어서
짓궂게 짓궂게 없어져보려는
심술맞은 연기도 있는 것이다

김수영(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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